- [성경본문] 에베소서1:4 개역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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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년 12월 15일 제목: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어느 날 세 명의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두루 다니면서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다고 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듣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나라는 로마입니다.
로마에서 유대에 분봉 왕을 세워서 통치하고 세금을 거둬들였는데 그 분봉 왕이 로마가 세운 헤롯입니다.
이 헤롯은 에서의 후손 에돔 사람이고 야곱의 12지파의 후손이 아니기에 유대인들이 헤롯의 권세에 따르기는 하지만 속으로는 헤롯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 헤롯이 유대인들에게 잘 보이려고 유대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전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개축하는 공사를 하였던 왕입니다.
그런 헤롯이 동방에서 온 평범하게 보이지 않는 세 사람이 우리가 저 멀리서부터 별을 따라왔는데 이는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경배하고자 함이라 하니 유대 예루살렘의 분봉 왕인 늙은 헤롯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근심하였습니다.
자신이 지금 유대 땅의 왕인데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하니 속내가 영 불편하였습니다.
헤롯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을 불러서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어보았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대답하기를 유대인의 왕은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인 그들은 예언서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대로 헤롯에게 바로 대답하였습니다.
헤롯이 자신의 속내를 가만히 감추고 동방에서 별을 따라 왔다는 세 사람을 불러서 자세히 물어보았습니다.
별이 언제 나타났느냐?
헤롯왕이 그들을 보내며 말합니다.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찾아보고 찾거든 내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그를 경배하겠다고 말합니다.
이는 아기를 찾아 죽이려는 헤롯의 계략이었습니다.
박사들은 헤롯 궁에서 나와서 베들레헴으로 가다가 다시 나타난 별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따라가는데 별이 한곳에 머물러 서서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그곳으로 들어가 보니 양들이 있고 막 태어난 아기와 그의 어머니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동방에서 온 그 세 사람은 매우 기뻐하고 기뻐하며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가지고 온 보배함을 열어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드렸습니다.
이후에 세 사람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아 헤롯에게 가지 아니하고 다른 길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떠나간 후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말합니다.
요셉아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요셉이 바로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가서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서 머물렀습니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던 요셉과 마리아가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으로 왔다가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를 낳은 기사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헤롯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를 죽이려고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날 것이냐고 물어볼 때 메시아를 고대하고 있었던 그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오늘 우리는 교훈을 찾고자 합니다.
먼 나라 동방에서 이방 나라의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실 분을 경배하기 위하여 별을 보고 찾아왔다는 소문을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들었습니다.
헤롯이 먼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불러서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느냐고 물었습니다.
유대인이요 대제사장이요 서기관들은 메시아가 배들레헴에서 날것이다(미 5:2)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헤롯에게 바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메시아를 대망하고 있었지만, 동방에서 온 세 사람의 말을 듣고도 그들은 메시아로 나실 아기에 대하여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왜일까?
그들은 성경의 예언을 알고는 있었지만 말씀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언약의 말씀을 알고 있다는 것과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믿음과 행함으로 실천되지 아니하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배우고 성경에 대한 지식이 상당할지라도 그 말씀을 믿지 아니하면 아무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진실로 하나님을 아는 믿음으로 이끌어 오지 아니하면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믿음은 가르친다고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 때에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자유의지는 사랑을 지양하는 바른 것인데 죄가 들어옴으로 발원지인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 중심적인 것으로 왜곡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태어날 때부터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믿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알리시기로 하실 때 사람이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음에도 사람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신 아들이신 자신에 대하여 하신 말씀 중에 요한복음 3장 16절부터 21절까지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성도라면 반드시 외워야 할 말씀입니다.
(요 3:16-21)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구원하려 하심이라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미우면 스스로 멸망하도록 내버려 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이시오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사람에게 주셨기에 그 사람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다 탕진하고 말았어도 남길 자를 남겨서 다시 사랑으로 회복하기를 창세 전에 작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의 구속으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피로 죄를 용서받은 성도가 사랑 안에서 온전하여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예정 안에서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구속의 은혜로 죄를 용서받은 사람과 자기 생각에 좋을 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의 뜻대로 섭리하시는 하나님께서 마침내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려고 독생자를 보내셨는데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 예수 그리스도, 그를 믿는 자는 생명으로 나아가고 곧 사랑으로 살아가고 믿지 않는 자는 빛보다 어둠을 사랑하는 자요 그러므로 정죄를 받은 것이요 그 정죄는 심판이라고 합니다.
곧 이 땅에서 이미 심판을 받았다 함은 말씀을 들어도 믿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그 자체가 악이라고 성경은 정의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깊히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예정 안에 있는 택한 자에게 준 하나님의 특별 계시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을 믿는 믿음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교회는 믿는 성도들이 모인 우리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노소와 젖먹이 아이까지 우리이기에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고 말씀의 은혜를 깨달아 서로 사랑함으로 모이기를 즐거워하며 찬송으로 예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에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에 이르지 못하는 지체들도 있습니다.
단단한 음식을 잘 먹는 사람도 있고 치아가 약하여 연한 음식만 먹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이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그의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의 죄 때문이 아니다 이 사람에게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진흙에 침으로 이겨 그 사람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리며 누워있는 38년 된 병자를 보고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로 물었습니다.
그 병자는 물이 동할 때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음으로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간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런 병자일지라도 예수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였다고 한 여자를 정죄하고 돌로 치려 할 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라고 하였습니다.
나이든 사람부터 젊은 사람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양심이 찔려 슬거머니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피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린 예수께서 그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그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할 때 아버지 저들이 모르고 그러하오니 저들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하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기 자신을 작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라는 존재가 무엇을 하리요 하고 뒤로 물러가지 마십시오.
사람은 차별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은 사랑하고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죄로부터 구원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추호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걷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열 번이 아니라 백번을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사랑해야 할 책임은 있지만 사랑을 포기할 책임은 없습니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 주님은 우리 각인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반드시 알게 하십니다.
우리 주님은 찾으시는 주님이시오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바울도 주님께서 찾으심으로 주님을 알았습니다.
바을은 하나님은 안다고 확신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전혀 알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벗어놓았던 옷을 지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이단자로 알았고 그들을 잡아 오려고 제사장으로부터 받은 공문을 가지고 다메섹까지 가던 열성 바리새인 유대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율법을 배운 지식과 경험으로 무장한 사울이 길에서 하늘에서 비취는 빛을 보고 눈이 멀어버렸고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는 성령의 음성을 듣고 바로 고꾸라져 주여 누구시니이까 하고 물었던 것입니다.
자기 신념으로 기세가 등등하던 사울이 어찌하여 사람들의 손에 의지해서 다메섹으로 들어갔는데 사흘 동안 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성령께서 예수님의 제자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사울에게 보내 안수함으로 다시 보게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니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비로소 제정신을 차린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하던 수제자였던 베드로도 3년을 예수님과 동행하였음에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어도 다시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간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시고 베드로의 상실하였던 믿음을 회복시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후에 베드로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제자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고 있다가 성령께서 임함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죽기까지 말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누구든지 하나님을 알기를 원하는 사람은 나를 향한 곧 우리 가족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향한 사랑은 조건이 없으며 변함이 없습니다.
자녀는 부모가 자녀를 향한 그 사랑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는 아버지를 진심으로 알기 원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에 의하여 자녀가 아버지를 알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알지 못하고 오해하고 부끄러워하면 그 자녀는 부모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부모를 알 수 있도록 애쓸지라도 자녀가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부모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자식이 부모를 통하여 난 것이 사실이요 부모는 자식을 아는데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모르면 그 관계성에는 사랑이 끊어진 관계성입니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수많은 족속과 민족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한 몸이었는데 기후와 환경에 따라 같은 몸인데 골격이 다르고 색이 다릅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도 처음에는 한 영혼이었는데 타락한 영의 침입과 인본주의적 사상으로 생각하는 마음이 다 다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도 그 마음이 열 사람이 열 사람 모두 다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람에게 계시하지 아니하시면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형상으로 하나님을 발견하기를 원하고 지성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타락한 사람의 본성이 모든 것에 대하여 인간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한다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사람이 그러할지라도 그들을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께서 말씀이신 성자 하나님을 성령으로 동정녀의 몸에 잉태되어 보이는 사람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입니다.
성부 하나님의 뜻은 죄의 권세를 무효화시키고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 생명을 주시려고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아브라함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였지만, 하나님은 이것까지도 사랑하사 말씀이 육신이 되어 보내심을 받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표적을 눈으로 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오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사상과 지식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자녀를 사랑하사 자녀들의 수준에 맞추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데까지 나갔습니다.
에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눅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실 때 쳐다보는 사람들이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가 와서 구해주는가 보자 하고 해면을 막대기에 꿰어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님의 입가에 대었습니다.
그 해면이 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똥을 누고 나면 닦고 다시 씻어 재활용하는 것이 바로 수세미 같은 해면입니다.
자기 백성을 사랑하여 오셨는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신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사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생명, 곧 예수님이 흘리신 그 피로 사람의 죄를 덮으사 죄의 값은 사망이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아버지의 공의가 만족되게 하심으로 죄의 권세를 멸하시고 자녀를 죄에서 구원하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녀를 예수님의 피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사 충만하게 하심으로 거듭난 영으로 곧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말씀의 능력으로 자녀들이 이 땅에서 창조적인 사랑의 삶을 목적하고 기쁘게 살아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자녀와의 회복된 관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맏아들이 되심으로 아버지의 예정 안에서 수많은 아들과 딸을 얻으신 것입니다.
잃어버렸던 자녀를 다시 찾았으니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뻐하겠습니까?
물로 씻어서 새 옷을 입혀주시고 새 신을 신겨 주시고 손에는 너는 내 자녀라는 금가락지를 끼워주시고 살찐 짐승을 잡아 큰 잔치를 베풀고 같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를 아버지께 받고 입은 우리가 어찌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어찌 아버지께서 입혀주신 새 옷을 더럽히며 새 신을 신은 발이 옛날로 돌아가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로 여러분들을 찾으셔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두신 것을 넘어 성령 하나님을 보내사 여러분과 동행하도록 은혜를 베푸셨고 성령께서 말씀과 함께 여러분과 동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나의 인생은 내 것이라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살아가는데 누가 어찌하랴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기다리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깨닫고 돌아오기까지
자녀가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서 끝내 돌아오지 아니하면 이 땅에서 성령님과 동행하는 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일찍이 아버지께서 주신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겉 포장만 보고 풀어보지 아니하고 한쪽 구석에 버려둔 것과 같습니다.
대부분의 많은 사람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임박하였을 때 그때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아버지의 얼굴을 구하지만, 이 땅에서 사랑하는 모든 기회는 다 지나가 버렸고 그 영혼만 주님께 돌아갑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사랑이 그 본성이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부끄러운 삶을 살았어도 그 영혼은 안식하게 합니다.
말씀의 결론입니다.
사랑을 알고 사랑으로 살아갑시다.
여전히 우리는 성도로서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목적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사랑의 삶을 실천합시다.
용서 없이는 사랑의 출발이 없습니다.
사랑은 흘려보내지 아니하면 생명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표현하지 아니하면 알 수 없습니다.
표현하십시오.
사랑한다고 말하십시오.
잘하고 싶은 마음이 여전한데 말하는 것이 서툴러서 미안하다고 말하십시오.
열에 하나 잘하는 것을 바라보고 격려하십시오.
주어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작은 일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큰일을 맡지 못합니다.
믿음도 소망도 항상 있을 것이지만 그중에 제 일은 사랑이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기에 하나님의 사랑은 여전히 우리의 모든 부족함을 다 덮어 주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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