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기서 강해 김종곤 목사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때로부터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종말까지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기록되었고
요한계시록 22장21절에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 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까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과 말씀 앞에 반응하는 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한 권의 책으로 보이지만 실제는 66권으로 되어있습니다.
구약 39권 신약 27권의 책으로 되어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한 모든 세계를 말씀으로 만드셨는데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궁창을 만드시고 땅과 바다와 풀과 채소와 나무와 해와 달과 별을 만드시고 생물과 새와 짐승과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은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되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 넣어주시므로 살아있는 영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에게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라는 사명을 주시고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원히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마귀의 소리를 듣고 미혹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마귀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불 순종의 죄를 범하였고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고 스스로 타락하여 죄가 온 땅에 관영하게 만들었어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할 뿐이니 하나님께서 땅위에 사람을 지으신 것을 탄식하시고 결국은 대 홍수를 통해 온 땅을 심판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와 노아의 가족을 구원하여 다시 새롭게 이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여 살아가라고 은혜를 주셨지요.
그러나 사람은 바벨탑을 쌓고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 하니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니 이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라 말씀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사람을 온 땅에 흩어지게 됩니다.
시간이 한 참 흐른 후에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부르셨는데 그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길을 떠나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땅으로 옮겨와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열 두 아들을 낳아 이스라엘 민족이 되게 하셨지요.
형제의 미움을 받고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을 통하여 히브리 민족은 큰 무리가 되었습니다.
때가 되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종살이 하던 히브리 민족을 애굽 땅에서 구원하사 홍해를 마른땅처럼 건너가게 하시고 광야 40년의 훈련을 통하여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약속의 가나안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셨어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그들로 열국에 제사장 나라로 삼기위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 말씀을 주셨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행하도록 하셨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였고 계속하여 거역하고 또 거역하여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역사를 반복합니다.
여호수아는 유언을 남기고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이후에 사사들이 다스리는 시대가 350여년 지나갔는데 그 때에도 여전히 그들이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행하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어둡고 답답한 사사기 시대에 모압에 살던 한 이방여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다윗왕의 증 조모가 되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룻기서 이고 그 여인의 이름이 룻입니다.
룻기서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는데 유다인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의 아들 말론과 기론 그의 며느리 오르바와 룻 그리고 엘리멜렉의 친척 보아스가 나옵니다.
룻기 1장 1절에서 5절까지 읽어 봅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 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 멜렉이요 그의 아내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론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이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 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 거주한지 십년 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참으로 안타깝고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살았던 유다인 엘리멜렉 가정에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이런 불행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사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실까요?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그 땅에 흉년이드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땅이 어딥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이라는 뜻을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떡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가나안 땅에 임한 흉년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흉년은 자연재해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서는 이때의 흉년을 소개하면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사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의 삶이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불의와 불법이 만연했던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에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심히 패역한 배도의시대 였다는 것입니다.
사사기서를 보면 타락-심판-회개-구원의 과정이 계속적으로 반복 되는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서의 기록배경이 사사 시대이므로 당시의 흉년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 신앙과 불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부분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당시의 상황이 흉년으로 힘들다 하여도 유다지파에 속한 엘리멜렉 가정이 전답과 집을 다 팔아가지고 이방 모압땅으로 이사를 간 것은 심히 잘못 결정하고 행한 것입니다.
엘리멜렉 이름의 뜻이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뜻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시고 허락하신 땅에서 흉년이 들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지 아니 하시는가 깊이 생각하고 흉년을 피해 나만 살겠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믿음의 인내로 하나님의 회복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엘리 멜렉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으로 이런 관점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해 메시아 계보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흉년이라는 고난에 적극 대처해야 했습니다.
믿음의 인내로 기꺼이 흉년을 감수 하면서 자신들의 불순종과 불신앙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한 것처럼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라는 적극적인 믿음으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에게 주어지는 고난은 어떤 형태로 다가오던지 피할 장애물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극복해야 할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워 시험에 들 정도가 된다면 주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하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결국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시련은 그것이 어떤 성격이든지 간에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과 연단의 과정인 것입니다.
하여튼 엘리멜렉과 그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와서 십여년을 눌러 살았습니다.
모압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행복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행이 연속적으로 찾아 왔습니다.
참으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를지라도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했던 잠언의 말씀이 옳습니다(잠16;25).
이들 가족이 모압에 이사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 아비멜렉이 죽었습니다.
남은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실 이들이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율법의 정신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 결혼 자체를 금기시 한것은 아닙니다.
악한것 까지도 선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때 구원함을 받은 기생이었던 라합이 살몬의 아내가 된것과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와 재혼하고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 일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요 모든 족속과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천지를 만드신 놀라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육신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보여 주시고 사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사 하늘로 올리워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우리 안에 거하게 하신 이때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사랑하심이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이들 가정의 불행은 아비 엘리멜렉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여년이 되어갈 쯤에 말론과 기론이 거의 동시에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오미는 절규하고 애통해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고 절규합니다.
흉년을 피하여 남편이 가자는 대로 모압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는데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래도 두 아들 며느리 보고 살아 왔는데 십년 만에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니 그 슬픔과 안타까움은 말로 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깊은 탄식 가운데 슬퍼하다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마지못해 살아가는데 졸지에 청상과부 된 두 며느리를 보니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힙니다.
남편이 베들레헴을 떠나고자 할 때 말려야 하는데 후회해도 할 수 없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두 아들 데리고 돌아갈 걸 후회해도 할 수 없고 오호라 통제라 슬퍼도다 내가 하나님을 떠났으니 하나님이 나를 치셨구나 탄식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치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떠나가니 세상권세에 휘둘림을 당한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에 고난은 감춰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하였던가요?
지금 남편 잃고 두 아들마저 잃고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는 나오미에게 고향으로부터 소식이 들려 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이제라도 내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
그러나 내가 무슨 염치로 돌아갈까 망설임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결정합니다.
두 며느리를 데리고 슬픔과 고생만 가득했던 모압땅을 마침내 떠납니다.
보따리 지고 이고 젊은 두 며느리 데리고 길을 가다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내가 택하여 이 고생을 자초하였지만 저 두 며느리는 무슨 죄가 있는가. 나의 불행을 저 아이들에게 짊어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두 며느리를 부릅니다.
오르바야.
예 어머니. 룻. 예 어머니,
돌아가라
나를 따라오지 말라.
너희들은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라.
가서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너희가 죽은 나의 두 아들을 사랑하였고 또 나를 선대 한것 같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대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하고 말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간다 말입니까? 하고 세 여인이 부둥켜 안고 웁니다.
나오미가 말합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는 소망이 없다. 내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자식을 낳는다 할지라도 너희가 어찌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 하니 그들이 또 부둥켜 안고 큰 소리로 통곡을 합니다.
마침내 큰 며느리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나오미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막무가네로 나오미와 동행하기를 고집합니다 14절 그들이 소리 높혀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쫓았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나중 형편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별되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
한 여인은 약속의 자녀로 영생에 이르고 한 여인은 약속과 상관 없는자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극구 고집하는 룻을 향해 재차 오르바처럼 떠나갈 것을 말합니다 .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그것도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여간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시어머니인 나오미 곁을 떠날 것을 강력히 권고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나오미 곁을 떠나는 오르바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책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을 때는 좋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걸리면 대부분 자기 유익을 위해서 각기 제 갈길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바라볼 뿐입니다.
생각이 같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교제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국이 사망과 생명으로 갈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며 현실과는 무관하게 여깁니다.
성경은 오르바가 모압으로 돌아간 것은 그 백성과 그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기록된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동행을 고집 합니다. 아예 맹세를 합니다(16-17절)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룻의 각오와 신앙고백이 대단합니다.
우리는 룻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몇가지 분명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비록 나오미가 흉년을 피해 모압지방에 가서 살아가는 불 신앙적인 태도를 취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앙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인 것을 전하였다는 것을 나오미의 말과 룻의 말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상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롬10;7).
그렇지 않고서는 이방 여인인 룻이 자기희생 적인 결단을 할 수가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룻이 현실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볼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의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엡2-8)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전15-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는 그것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을 알 수도 없으니 그러한 일들은 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것입니다.
나오미는 유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의 땅으로 결국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왔을 때에 온 성읍이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이게 나오미냐 어떻게 된 사실이냐 남편과 두 아들은 어떻게 된.것이냐?
이 젊은 여인은 누구냐? 그래, 그래도 잘 왔다 하고 반깁니다.
반기는 고향 사람 앞에 나오미는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 불러라. 내가 풍족한 중에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뜻은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입니다.
마라의 뜻은 괴로움, 쓰라림, 쓰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현재 자신의 처지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너무나도 비참하고 부끄럽다고 말하고 자신을 마라라 불러라 합니다.
우리는 여기는 교훈을 얻습니다.
고난과 시련 앞에서 사람이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도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실족하고 실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우리는 현실과 주어지는 상황 앞에서 잘못 반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인생이 나의 일생이 나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를 자녀 삼으신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나는 우리는 그분의 자녀인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는 얼마나 감사한 시대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거룩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거룩하여지고 구별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자신으로는 그 어떤 의로운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 일지라도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께 무슨 모습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고 뵐 올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요14;4).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3;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 이 세상에 의인은 없되 한명도 없다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요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 하실 때에 말씀으로 함께 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이 사람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고 사셨고 하나님을 보여 주셨고 진실로 죄 없으신 참 사람이 되어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이루어지고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하므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드리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셨고 나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구나 하는 것을 믿고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기 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비록 우리의 발은 땅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본향은 우리 주 예수님이 계신 곳 저 하늘인 것을 굳게 믿고 호흡하는 날 동안 담대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처지를 자신이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떠났기에 보호받지 못한 것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심정으로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돌아오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불신앙의 길을 걸어가면 책망하십니다.
스스로 깨닫고 돌아오기를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세상에 이리 저리 방황하도록 내버려 두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음 졸이시며 끊임없이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사는 길을 택하라고 계속하여 말씀 하십니다.
집 나간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었어도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때에 아버지는 지나간 일들을 책망하지 않습니다.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씻기시고 옷을 갈아입히고 너는 내 아들이다 하고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시고 기뻐하시고 잔치를 베푸십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요 부모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고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고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고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고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고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고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고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다고 전도서에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때와 환경과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십니다.
일생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때를 분별하는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룻기서 1장은 엘리멜렉의 실수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이방의 한 여인 룻을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으로 들어오게 하셔서 사람의 불순종과 불신앙으로 인하여 끊어질 수도 있었던 메시아 출생의 계보를 이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불가피하게 겪게 되는 고난과 시련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정금같이 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 것을 기억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함으로 호흡하는 날 동안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며 구원의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지경에 진노를 거두시고 양식을 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고 있습니다.
나오미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왔을 때에 하나님의 보호하심의 섭리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보게됩니다.
나오미가 자신의 불신앙을 뉘우치고 돌아온 것처럼 구원을 누리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실수도 많이 하고 잘못 결정하고 행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때와 사람과 환경을 통하여 성도를 깨우치면 솔직히 실수와 실패를 인정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주께로 돌아오면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받아주시고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장소가 바뀌고 나오미는 베들레헴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가진 것 다 잃어버리고 양식도 없지만 나오미의 심령은 하나님의 은혜로 평안합니다.
룻기1장 22절에서 나오미가 돌아온 그때는 보리를 추수하는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룻이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어머니 제가 밭에 가서 이삭을 주워 오겠다고 말합니다.
룻이 보리를 베는 어느 한밭에 가서 이삭을 줍는데 룻기2장 3절에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 속한 밭이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우연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당시에는 잘 깨닫지 못하여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다시 한번 때와 사람과 환경을 통하여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서 보아스가 누구인지 한번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성경은 보아스가 유력한자라고 말합니다.
(보아스의 아버지는 살몬이고 그의 어머니는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에 구원함을 받은 기생 라합)
보아스는 생각도 깊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앙하는 분이었습니다.
일하는 사환들도 존중히 여기는 인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리를 수확하는 일꾼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말합니다.
사환들이 주인에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합니다.
서로를 존중히 여기는 노사 관계입니다.
보아스가 말합니다.
저기 이삭을 줍고 있는 소녀는 누구이냐하고 묻습니다.
일꾼들이 대답합니다.
나오미와 함께온 모압에서 시어머니를 따라온 이방 소녀인데 그의 말이 이삭을 줍도록 하여 주소서 말하고 아침부터 와서 잠시 쉬는 외에는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합니다.
보아스가 룻을 불러서 말합니다.
내 딸아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을 가지 말고 여기서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합니다.
내가 소년들에게 명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면 소년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라하고 룻에게 친절을 베풀어 줍니다.
룻이 땅에 엎드려 절하며 말합니다.
저는 이방 여인이거늘 어찌하여 제게 은혜를 베푸시고 살펴 주십니까 합니다.
보아스가 말합니다.
내 딸아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을 내가 다 들었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축복해줍니다.
룻이 말합니다.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뻐게 하는 말씀을 하시니 감사합니다 합니다.
점심을 먹을 때에 보아스가 룻을 불러서 이리로 와서 같이 먹으라 합니다
룻이 배불리 먹고 다시 이삭을 주우러 밭으로 갑니다.
보아스가 사환들에게 말합니다.
그를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주워도 나무라지 말고 곡식 단에서 이삭을 뽑아 일부러 흘리라고 까지 합니다.
참으로 보아스는 친절하고 마음이 온유한 분입니다.
룻이 이삭 주운 것을 손질해서 시어머니에게 가져옵니다(약22리터).
점심때 먹고 남은 음식을 남겨 싸가지고 와서 시어머니에게 드립니다
나오미가 놀랍니다.
내 딸아 어디서 이렇게 많이 주웠느냐 너를 돌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합니다.
룻이 여차 여차 해서 여차 여차 했습니다 하니
그랬구나. 그가 여호와께로부터 복 받기를 원하노라.
그가 살아 있는 자에게 죽은 자에게도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 하도다 하고 그는 우리 기업 무를 자 중의 한분이니라 하고 말합니다.
룻이 말합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기를 추수를 마칠 때까지 내 소년들과 같이 있으라고 했습니다.
나오미는 말합니다.
내 딸아 다른 밭에는 가지 말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것이 좋겠다하고 말합니다
이에 룻이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시어머니를 정성을 다해 섬깁니다.
여기까지가 룻기 2장의 내용입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보아스 그분은 우리 기업 무를 자 중의 한분이니라고 말한 그 기업 무를 자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레위기 25장23-28까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으로 토지를 물린다 토지를 되돌린다는 것으로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곳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땅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에 하나님의 것입니다.
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공평하게 기업으로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땅을 독차지하고 부의 원천으로 삼는다면 이는 하나님의 법을 고의적으로 불순종 하는것입니다.
비록 믿음의 형제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어려움이 있어 팔았다면 그 형제의 가까운 사람이 능력이 있다면 형제가 판 것을 다시 사서 판 형제의 이름으로 돌려주어 그 형제의 가문이 이어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은혜의 배려 하심입니다.
나오미가 레위기의 말씀을 알고 있고 믿음으로 받고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믿음의 여인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생사는 새로운 만남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면서 전개됩니다.
사람은 만남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 다양한 인생사가 펼쳐집니다.
친구와 배우자의 선택, 어떤 직종에 일을 하느냐의 문제는 일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영향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합한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의 물음에 여러분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전 인격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다고 믿음의 고백을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주님 계신 곳 저 하늘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오늘도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하므로 나를 존재하게 하신 하나님,
나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하나님,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의 환경이 어떠하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말씀으로 내 안에 역사하시므로 나의 소망하는 바를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능력으로 넉넉히 이길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지체된다 할지라도 인내하고 기다리며 나의 나 된 것이 주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을 고백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기를 원합니다.
룻기서 3장으로 갑니다.
보리와 밀의 수확이 끝나가는 어느 날 나오미가 룻을 부릅니다.
내 딸아.
예 어머니.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말합니다.
너에게 친절을 베푼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고 기업 무를 자가 아니냐 하고 나오미는 룻이보아스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지혜를 냅니다.
그리고 룻에게 여차 여차하라고 시킵니다.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가라 보아스가 먹고 마시기를 다 할때까지 눈에 띄지 않도록 하고 보아스가 누울 때에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게 네 할 일을 알게 하리라.
룻은 어머니가 시키시는 대로 순종합니다.
보아스가 곡식 단 더미의 끝에 누웠는데 룻이 가만히 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눕습니다.
밤중에 보아스가 놀라 일어나 보니 자기 발치에 한 여인이 있는지라.
네가 누구냐 묻습니다.
룻이 대답합니다.
나는 당신의 여종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을 펴서 당신의 여종을 덮어소서. 이는 당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 하고 담대히 말합니다.
보아스가 말합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젊은자를 따르지 아니 하였으니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 이제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행하리라.
참으로 나는 기업 무를 자이나 나보다 더 가까운 사람이 있으니 날이 밝으면 그 사람을 찾아 물어보고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즐겨 행하지 아니하려 하면 내가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리라 말합니다.
곧 새벽이 되니 보아스가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지워주고 빈손으로 네 시어머나에게 가지 말라 하고 보냅니다.
룻이 돌아오니 나오미가 묻습니다 내 딸아 어떻게 되었느냐?
룻이 여차여차 하고 모든 것을 다 말합니다.
알았다. 내 딸아 여기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일을 성취하기까지 쉬지 아니하리라 하고 기다립니다 여기까지가 3장의 내용입니다.
보아스는 룻의 기업 무를 자 고엘이 되겠노라 약속하고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나오미의 마음을 받아들입니다.
이제 앞으로의 일은 보아스에게 넘어 갔습니다 나오미와 룻의 입장에서 행할 바의 도리를 다 마쳤습니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룻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나오미는 확신에 찬 말로 말합니다.
내 딸아 가만히 있어 보아스가 하는 일을 지켜보자 합니다.
자 이제 룻기서 4장으로 넘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땅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긍휼의 베푸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을 만나게 됩니다 .
이제 하나님께서 보아스와 룻을 결혼하게 하심으로 엘리 멜렉 으로 끊어질 수도 있었던 메사아 계보를 이어 가게 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가서 앉아 있습니다.
때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그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갑니다.
보아스가 부릅니다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시게 하고 아무개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가 장로 열명을 청하여 앉게 하고 공개적으로 말합니다.
여차 여차해서 내가 엘리 멜렉 집안에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나보다 먼저인 아무개가 있으므로 그가 기업 무를 자의 의무를 행하기를 거절하면 그 다음은 나니 내가 무르리라 말합니다.
그런데 그 아무개가 내가 무르리라고 말합니다.
보아스가 다시 설명합니다.
아무개 당신이 나오미의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 사는 것이니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고 고엘법을 알려 줍니다.
아무개가 말합니다 그렇게 까지 해야 한다면 내게 손해가 날까하니 무르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이 하시오 하고 신을 벗어 줍니다.
보아스가 말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증인이 되었습니다.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과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하겠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증인이요 잘 되었소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상속자를 주시고 유명하게 되기를 웡하오 하고 축복해 줍니다.
룻기4장 13절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심으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말합니다.
찬송할지로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여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며 기뻐합니다.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이웃 여인들이 이름을 지어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아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할렐루야.
슬픔과 애통이 변하여 기쁨이 된 아름다운 이야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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