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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11일 제목: 돌아가는 나오미, 따라오는 룻
김종곤 2024-08-13 추천 0 댓글 0 조회 20
[성경본문] 룻기1:15-18 개역개정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18.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811일 제목: 돌아오는 나오미와 따라오는 룻

본문: 1:15-18

 

이 세상에는 사람의 역사가 있고 나라의 역사가 있습니다.

과거가 있었기에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기에 미래도 있습니다.

한 사람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날이 있었기에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는 것입니다.

나를 낳아주신 부모가 있었기에 내가 오늘 존재하고 있고 내가 오늘 존재하고 있기에 자녀를 낳아 유업을 이어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곧 내가 남긴 세상이 내가 태어난 세상보다 더 좋았더라고 말할 수 있다면 족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사 성부 하나님의 구속사를 완성하심으로 성령 하나님께서 오시고 이천년이 되어가는 시점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땅과 하늘의 모든 권세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기 생명으로 우리를 구속하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용서받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믿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늘날 우리를 세상에서 방편으로 삼아 새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분은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삼위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였다는 것을 압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에 따라 사람을 지으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어 주심으로 사람이 몸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다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의 근원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심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배웠고,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깨닫게 된 것을 믿음으로 삶에 적용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한 사람에게 주신 특별은총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성경을 통하여 성부 하나님의 작정과 성자 하나님의 구속과 성령 하나님의 적용하심을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적으로, 언약적으로, 계시적으로 구속사를 완성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분이시요 구약을 온전히 완성하신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으로 사람의 죄를 구속하시기 대략 이천 년 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의 큰아들 셈의 후손 중에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을 찾아오사(12:1-3) 약속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로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니 곧 자손을 많게 하겠다. 땅을 주겠다(12:7),(15:18). 네 후손으로 대적의 성문을 취하게 하겠다고(22:17-18) 언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의 씨인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 요셉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애굽 고센 땅에서 번성하여 민족이 되게 하셨고, 여호수아를 통하여 약속한 가나안 인이 살던 모든 땅을 취하도록 하셨고, 다윗을 통하여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을 주셨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로 만왕의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렸습니다(삼하 7:18-29).

 

이스라엘이 민족이 되고 약속의 땅을 취하고 난 이후에 왕이 세워지기 전에 하나님께서사사들을 통하여 이스라엘 다스리는 시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취하고 이스라엘 12지파에게 나누어 준 여호수아와 하나님의 계시를 눈으로 보았던 믿음의 사람들이 죽고 난 이후에 이스라엘 자손은 빠르게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아갔던 시대가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사시대입니다.

 

참으로 어둡고 답답한 그때 그 시절에 모압에 살던 한 이방 여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다윗왕의 증조모가 되는 역사적인 일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가 기록된 책이 룻기요, 그 여인의 이름이 룻입니다.

룻기는 네 장으로 된 짧은 성경이지만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합니다.

룻기에는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유다인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의 아들 말론과 기론 그의 며느리 오르바와 룻 그리고 엘리멜렉의 친척 보아스가 나옵니다.

 

이방 여인이었던 룻이 청상과부가 되었지만, 그녀는 그의 시어머니를 따라 시어머니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보아스를 만나 재혼을 하여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음으로 하나님께서 언약적 구속사를 이루어가는 역사에서 산 증인이 됩니다.

 

룻기 11절에서 5절까지 읽어 봅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론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그들이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 거주한 지 십년쯤에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참으로 안타깝고 기막힌 이야기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살았던 유다인 엘리멜렉 가정에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까요?

왜 이런 불행하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성경으로 기록되게 하사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실까요?

본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절에 그 땅에 흉년이드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땅이 어딥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베들레헴의 뜻은 떡()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빵집이라는 뜻을 가진 베들레헴 그 땅에 흉년이 들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가나안 땅에 임한 흉년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흉년은 자연재해의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서는 이때의 흉년을 소개하면서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고 불의와 불법이 만연했던 시대였습니다.

사사기 2125절에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음으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로 쉽게 표현하면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살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영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심히 패역한 배도의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사사기를 보면 타락-심판-회개-구원의 과정이 계속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룻기의 기록배경이 사사 시대이므로 당시의 흉년은 자연재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 신앙과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부분이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당시의 상황이 흉년으로 힘들다 하여도 유다 지파에 속한 엘리멜렉 가정이 전답과 집을 다 팔아가지고 이방 모압땅으로 이사를 간 것은 심히 잘못 결정하고 행한 것입니다.

 

엘리멜렉 이름의 뜻이 나의 하나님은 왕이시다 라는 뜻입니다.

자녀의 이름을 누가 짓습니까?

아버지이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자녀의 이름을 그냥 아무 뜻 없이 짓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뜻을 담아 그 뜻이 아들로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짓는 것입니다.

 

엘리멜렉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신 뜻에 대하여 무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주신 땅에서 흉년이 들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아보지 아니하시는가 깊이 생각하고 흉년을 피해 나만 살겠다고 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하고 믿음의 인내로 회복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엘리멜렉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으로 이런 관점에서 실패했습니다.

그가 유다 지파에 속해 메시아 계보에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더욱더 흉년이라는 고난에 적극 대처해야 했습니다.

믿음의 인내로 기꺼이 흉년을 감수하면서 자신들의 불순종과 불 신앙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구원의 때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사람들에게 가르치실 때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 사람이 나를 먹으면 살리라 (6:51).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6:57)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이 어렵도다 하고 떠나갑니다(6:66).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고 너희도 가려느냐? 묻습니다.

베드로가 고백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오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성도에게 주어지는 어려움은 어떤 형태로 다가오던지 도망가거나 피할 장애물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대처해서 극복해야 할 필수적인 과제입니다.

기다려야 할 것인가?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돌파해야 할 것인가? 기도함으로 성경에서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감당하기 어려워 시험에 들 정도가 된다면 주님께서 피할 길을 주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 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그렇다면 결국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어려움과 시련은 그것이 어떤 성격이든지 간에 성도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훈련과 연단의 과정인 것입니다.

 

하여튼 엘리멜렉과 그의 가족은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이사를 와서 십여년을 눌러 살았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사는 동안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행복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행이 연속적으로 찾아 왔습니다.

참으로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를지라도 필경은 사망의 길이라고 했던 잠언의 말씀이 옳습니다(16;25).

이들 가족이 모압에 이사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 엘리멜렉이 죽었습니다.

남은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은 모압 여인 오르바와 룻을 취하여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실 이들이 모압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율법의 정신을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방 여인과 결혼하지 말라는 것은 우상숭배의 위험성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지 결혼 자체를 금기시 한 것은 아닙니다.

 

악한 것까지도 선함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여리고 성이 무너질 때 구원함을 받은 기생이었던 라합이 살몬의 아내가 되어 보아스를 낳은 것과 이방 여인 룻이 보아스와 재혼하고 다윗왕의 증조모가 된 일들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요 모든 족속과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이 천지를 만드신 놀라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이들 가정의 불행은 아비 엘리멜렉의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십여년이 되어갈 쯤에 말론과 기론이 거의 동시에 죽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나오미는 절규하고 애통해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셨다고 절규합니다.

나오미는 흉년을 피하여 남편이 가자는 대로 모압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이사를 왔는데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그래도 두 아들보고 살다가 이제 두 며느리 보고 위로를 얻었는데 두 아들이 세상을 떠나니 자식을 먼저 보낸 어미의 그 슬픔과 안타까움은 말로 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깊은 탄식 가운데 슬퍼하다가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까 마지못해 살아가는데 졸지에 청상과부 된 두 며느리를 보니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힙니다.

남편이 베들레헴을 떠나고자 할 때 말려야 하는데 후회해도 할 수 없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두 아들 데리고 돌아갈 걸 후회해도 할 수 없고 내가 하나님을 떠났으니 하나님이 나를 치셨구나 탄식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치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떠나가니 세상 권세에 휘둘림을 당한 것입니다.

 

지금 남편 잃고 두 아들마저 잃고 절망과 슬픔에 빠져있는 나오미에게 고향으로부터 소식이 들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셔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입니다.

나오미는 이제라도 내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가 무슨 염치로 돌아갈까 망설입니다.

마침내 나오미는 결정합니다.

두 며느리를 데리고 슬픔과 고생만 가득했던 모압땅을 떠나 고향으로 발길을 향합니다.

나오미는 보따리 지고 이고, 젊은 두 며느리 데리고 길을 가는데 자신의 처지가 기가 막힙니다.

나는 내가 택하여 이 고생을 자초하였지만, 저 두 며느리는 무슨 죄가 있는가?

나의 불행을 저 아이들에게 짊어지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생각하고 두 며느리를 부릅니다.

오르바야.

예 어머니. . 예 어머니,

돌아가라

나를 따라오지 말라.

너희들은 너희 친정으로 돌아가라.

가서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

너희가 죽은 나의 두 아들을 사랑하였고 또 나를 선대 한 것 같이 하나님께서 너희를 선대 하여 주시기를 원한다 하고 말합니다.

어머니.

어머니를 두고 우리가 어디로 간다 말입니까? 하고 세 여인이 부둥켜안고 웁니다.

 

나오미가 말합니다.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나는 소망이 없다.

내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자식을 낳는다 할지라도 너희가 어찌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않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다 하니 그들이 또 부둥켜안고 큰소리로 통곡을 합니다.

 

마침내 큰 며느리 오르바는 눈물을 흘리며 나오미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친정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룻은 막무가네로 나오미와 동행하기를 고집합니다.

14절 그들이 소리 높혀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쫓았더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나중 형편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별되었음이 틀림이 없습니다 .

한 여인은 약속의 자녀로 영생에 이르고 한 여인은 약속과 상관없는 자가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극구 고집하는 룻을 향해 재차 오르바처럼 떠나갈 것을 말합니다.

남편이 죽은 상황에서 그것도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신다는 것은 여간 큰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시어머니인 나오미가 그의 곁을 떠날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때문에, 나오미 곁을 떠나는 오르바의 선택을 부정적으로 책망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좋을 때는 좋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걸리면 대부분 자기 유익을 위해서 각기 제갈 길로 가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바라볼 뿐입니다.

생각이 같고 뜻이 같은 사람끼리 교제하고 살아가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국이 사망과 생명으로 갈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중의 문제이며 현실과는 무관하게 여깁니다.

성경은 오르바가 모압으로 돌아간 것은 그 백성과 그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기록된 사실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나오미와 동행을 고집합니다.

아예 맹세를 합니다(16-17)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합니다.

룻의 각오와 신앙고백이 대단합니다.

우리는 룻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비록 나오미가 흉년을 피해 모압지방에 가서 살아가는 불 신앙적인 태도를 취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하나님을 신앙하는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켰을 뿐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인 것을 전하였다는 것을 나오미의 말과 룻의 말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사실상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10;7).

 

그렇지 않고서는 이방 여인인 룻이 자기희생 적인 결단을 할 수가 없으며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룻이 현실 앞에서 믿음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손길의 역사를 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의 결단을 내리는 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고전12-3)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

(2-8)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전15-10)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는 그것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것을 알 수도 없으니 그러한 일들은 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는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이 옛날이나 지금이나 동일한 것입니다.

나오미는 유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약속의 땅으로 결국 다시 돌아왔습니다.

나오미가 고향으로 왔을 때 온 성읍이 떠들썩했다고 합니다.

이게 나오미냐?

어떻게 된 사실이냐? 남편과 두 아들은 어떻게 된 것이냐?

이 젊은 여인은 누구냐?

 

그래도 반기는 고향 사람 앞에 나오미는 말합니다.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라. 나를 마라라 불러라.

내가 풍족한 중에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를 비어 돌아오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나오미의 뜻은 은혜로운 자 사랑스러운 자라는 뜻입니다.

마라의 뜻은 괴로움, 쓰라림, 쓰다라는 뜻입니다.

나오미는 현재 자신의 처지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너무나도 비참하고 부끄럽다고 말하고 자신을 마라라 불러라 합니다.

 

우리는 여기는 교훈을 얻습니다.

고난과 시련 앞에서 사람이 포기하면 하나님께서도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실족하고 실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우리는 현실과 주어지는 상황 앞에서 잘못 반응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의 인생이 나의 일생이 나의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를 자녀 삼으신 하늘에 계신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나는 우리는 그분의 자녀인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얼마나 감사한 시대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거룩하지 아니하면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거룩하여지고 구별될 수가 있습니까?

우리 자신으로는 그 어떤 의로운 사람이라 불리는 사람 일지라도 스스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께 무슨 모습으로 나아가서 기도하고 뵐 올 수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14;4).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3;5).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에(3:23) 이 세상에 의인은 없되 한 명도 없다(3:10)고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요(6:23)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9:22)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입으로 예수를 주라 시인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라(10:9-10) 하였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함께 하셨던 우리 주 예수님이 사람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사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죄 없으신 참 사람이 되어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진실로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주 예수님으로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진실로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 사망 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전히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할 수 있으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함으로 살아갈 수 있으며 주님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나오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왔을 때, 이후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섭리를 다음에 나누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항상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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