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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8월 4일 제목: 행함과 믿음, 믿음과 행함
김종곤 2024-08-04 추천 0 댓글 0 조회 28
[성경본문] 야고보서2:14-26 개역개정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제공: 대한성서공회

202484일 제목: 행함과 믿음, 믿음과 행함

본문: 야고보서 214-26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유대 갈릴리지역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사람들이 알기로는 그는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요셉이 약혼한 마리아와 살림을 차리기 전에,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뜻을 가진 예수의 이름으로 나셨습니다(1:1-25)

 

사람들은 예수를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의 계시로 예수 그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낳고 난 이후에 네 명의 아들을(야고보,요셉,시몬,유다)(13:55) 더 낳았고 자매도 낳았지만, 자매가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그들의 형인 예수님을 성자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사람으로 나신 분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30세에 집을 떠나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내려오사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고 시작된 공적인 생애와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하신 것을 보았어도, 성령님이 임하시기 전에는 예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12명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름에 따라다녔습니다.

그들은 물고기를 잡아 시장에 팔고 살아가던 안드레와 베드로, 요한과 야고보, 목수였던 도마와 세리 장이었던 마태, 나중에 예수님을 배신한 가롯 유다, 그리고 평범한 다섯 명의 사람들( 빌립과 바돌로매(나다나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가나안인 시몬, 다대오)이었습니다.

 

예수님 온 동네를 두루 다니시면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천국 복음을 전하는데 그 소문이 온 유대에 퍼졌고 사람들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보려고 몰려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는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다.(9:19) 예례미야다, 엘리야다, 우리 민족을 구원할 모세와 같은 사람이다, 다윗과 같이 우리 왕이 될 사람이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바라는 소망대로 말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을 보면서도 혹시 그가 오리라는 예언된 메시아가 아닌가 생각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적대시합니다.

그들은 모세 오경과 시편에 기록된 대로 아브라함의 약속의 씨요, 그들이 존경하는 위대한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님을 지독한 시기와 질투로 정죄합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사람들의 병을 고치는 것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그렇게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예수를 죽일까 처음부터 공모하였고, 결국 법 없는 자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죽입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는 예수님을 사람들이 미친 것이 아니냐까지 합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동생과 모친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갔는데 사람이 많아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동생과 모친이 밖에서 당신을 찾는다고 말합니다.

 

그때 예수께서 무리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누가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이냐 보라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 사람들이 내 어머니요 내 형제들이라고 말합니다(8:21)

 

야고보, 그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지 못하였던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목도하고, 오순절 날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오리라 하신 성령 하나님이 그 위에 임하였을 때, 하나님의 계시를 온전히 깨닫게 되고 예수님을 베드로가 말한 바와 같이 입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신 것을 삶으로 증거하게 됩니다.

 

야고보는 11절에서 예수님을 나는 예수님의 동생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라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야고보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습니다.

 

세배대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는 요한 사도의 형인데 사도들 중에 제일 먼저 순교(AD42-44) 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한 야고보는 요셉과 마라아가 낳은 예수님의 동생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합니다.

종은 직분이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야고보는 자신이 하나님과 예수그리스도께 소유된 자라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의 신분이 된 것을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종교개혁의 시작은 15171031일 천주교 신자였던 마틴 루터가 교황이 권위의 중심이 된 교회 정치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났다는 것을 지적하는 95개의 반박문을 발표하는 사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전에 종교 개혁가들의 신학 운동이 있었지만, 마틴 루터가 불을 댕겼습니다,

지금도(카톨릭 교회) 그렇지만, 그 당시에 서방교회는 성경보다 교황과 교회직제, 교회전통에 더 큰 권위를 두고 면죄부 판매, 연옥에 대한 주장, 공로 사상등으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생명의 길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사람이 죄에서 구원받는 것은 교황이나 교회 정치를 따르고 무슨 공로로 구원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 다시 말하면 믿음으로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함으로 성경으로 돌아가자고 개혁을 외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합니다.

(3:23-28)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 있느냐 있을 수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나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아멘입니다. 진실로 아멘입니다.

 

자 그런데 로마서도 성경이요 야고보서도 성경입니다.

로마서는 믿음으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느니라 하고 야고보서는 28절에서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 하는 것이거니와,

14절에서 이어 말합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7절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20절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말하고 이어서 야고보서는 아브라함의 예와 라합의 예를 들어 행함이 있는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라고 증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행함보다 믿음을 먼저 말하는 것과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 부딪힙니까?

마틴루터도 이신칭의를 성경에서 깨달았고 그는 한때 야고보서는 성경으로 받아들여진 것에 대하여 의문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과연 믿음이 먼저냐 행함이 먼저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행함과 믿음이 부딪히고 믿음과 행함이 부딪칩니까?

전혀 그렇치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 야고보서를 나눕니다.

야고보서의 수신자는 스데반 집사의 순교 이후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져 살아가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에게 야고보가 성령님의 감동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일차적으로 고난 가운데서 당황하는 그들에게 세상이 우리를 미워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시련과 시험을 약속을(생명의 면류관) 바라봄으로 인내로서 이겨내자고 말합니다.

 

야고보는 12절에서 바로 직설적으로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합니다.

시험을 인내로 온전히 이루라. 온전히 이루라는 말은 중도에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참고 견디라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말이야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기진 지식이나 지혜로 인내를 온전히 이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환란 가운데 기뻐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야고보는 그런 우리를 마음을 알기에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구하라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면 그가 우리로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내고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셨던 우리 주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소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험에 대한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발견하기를 원합니다.

 

지금 야고보가 말하는 것은 시련이 외부로부터 오는 것에 대한 것을 말합니다.

세상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사탄의 영향력으로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적대합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자녀인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삶에서 바른 생활을 지양하는 그 마음과 자세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인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탄의 세력들이 그 정체가 드러났고, 예수님의 구속으로 그들이 그리스도인을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도를 공격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묵인하시기도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당신의 자녀를 믿음으로 더욱 성숙시키기 위하여 그렇게 하십니다.

이해가 되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창세 전부터 말씀으로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독생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자신을 낮추사 사람에게 철저히 멸시를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열두 군단으로 된 천사를 동원하여 자신을 멸시하는 사람들을 쓸어버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합니다, 기도하셨으며, 사람들의 멸시와 십자가의 극한 고통을 참으시고 죽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극심한 고통 가운데 내가 목마르다 하였을 때, 사람들이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 엘리야가 와서 구해주는지 보자 말하고, 해면을 갈대에 꿰어 신 포도주를 적셔 예수님의 입가에 대었습니다.

해면이 뭔지 아십니까?

수세미 같고 오늘날로 치면 스펀지 같은 것인데, 그것은 사람이 자기 엉덩이 묻은 똥을 닦고 나서 반복해서 쓰려고 물에 씻어, 가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셨고 승천하사 성부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주권을 가지시고 심판 주로 계시며 때가 이르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야고보는 형제들에게 역설적으로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면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시련이 외부에서 온 것인가?

아니면 내부로부터 말미암은 것인가?

 

다시 말하자면,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내부에서 틈을 제공함으로 시험이 담을 넘어온 것인가? 아니면 자기중심적인 지식과 경험 또는 다른 사람들이 생각 없이 말하는 무정한 말들로 인한 것인가?

아니면 작은 돌에 걸려 넘어진 것인가?

듣기 싫어도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솔직하게 자신을 비추어보고, 생명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중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야고보는 외부로부터 온 시험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인내함으로 끝까지 이겨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내부로부터 온 시험은 자신을 변호하거나 속이지 말고 회개함으로 바로 돌이키라고 합니다.

17절에서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 온다고 말합니다.

빛들의 아버지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 다시 말하면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합니다.

 

야고보는 우리가 무엇을 행함으로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것을 믿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완성자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예언을 폐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 몸으로 성취하시고, 새 언약 가운데 우리를 두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함으로 믿음의 성취를 보여 주셨고 예수님은 믿음으로 전적인 순종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곧 믿음에는 당연히 행함으로 나타나고, 행함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을 예수님께서 한나님의 맏 아들로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눈으로 보지 못하고 복음을 읽고 들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과 행함으로 나아가고자 끙끙거리는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함이 아니면 우리의 연약함이 오죽하겠습니까?

 

야고보는 2장에서 너희가 주 예수님을 믿었느냐? 그렇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마음은 곧 너희가 가지고 있다는 믿음, 그 자체는 죽은 것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의 삶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는 믿음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선을 행하지 않는 사람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4:7)

 

야고보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선물을 받은 사람은 누가 시키거나 말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선한 행동과 삶을 목적하고 실천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떤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습니다(10:25-37)

예수님은 그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기를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였나이다 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기를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 합니다.

 

그때 그 율법학자가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비유로 한 이야기를 들려주시는데 우리가 잘 아는 자비를 베푼 사마리아인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에게 너도 가서 사마리아인이 행한 것처럼 이같이 행하라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방 사람과 같이 여기고 무시하였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서 정통 유대인이라 자청하는 사람들의 인식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야고보는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타락한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알고 싶다고 하여도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동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깨닫는 마음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지 아니하면 죄송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진실된 믿음의 열매는 행함으로 나타납니다.

진실된 믿음이란 살아있는 믿음이요 믿음이 없이는 행함이 있을 수 없고 행함이 없는 믿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주님과 동행하는 믿음입니다.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요 믿음 없이 행하는 것도 자신을 자랑하고자 행하는 것이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음과 행함으로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으며, 기생 라합이 믿음과 행함으로 이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는 여러분이 많이 들었고 잘 알 것입니다.

 

라합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이 여인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시기 1400여년 전에 모압 맞은편 요단 동쪽 여리고 성에 살았던 여인이요 그는 높이 쌓은 성벽에 창을 내고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한글 성경은 기생 라합이라 번역하였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창녀 라합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여인은 사람들을 통하여 소문을 들었습니다.

저 멀리 애굽이라는 나라에 한 히브리민족이 애굽에 종으로 살았는데, 그들이 믿는 여호와라는 신이 40년 전에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한 일과 홍해 바다를 마른 땅 같이 건너가게 한 일과 그들이 지금 우리가 사는 가나안 땅으로 오는데 얼마 전에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죽이고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들었습니다.

 

라합은 소문으로 들리는 그들의 신은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들의 신 여호와가 이 땅을 그들에게 주었다는 것과 그들이 이미 여리고 맞은편 강 건너까지 왔다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남자가 주막에 유숙하려고 들어옵니다.

라합은 많은 남정네들의 행사를 겪어 보았기에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자기 집에 들어온 이 두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바로 알아차립니다.

 

어떤 사람들이 여리고 왕에게 이스라엘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왔다고 전합니다.

여리고 왕이 군사를 보내어 오고 있습니다.

라합이 바로 눈치를 채고 급히 두 사람을 지붕 위로 데려다가 널어놓은 삼대 밑에 숨기고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내려와 있습니다.

군사들이 문을 두드리고 들이 닥칩니다.

네 집에 들어온 사람을 끌어내라 그들은 이 땅을 정탐하러 온 간첩이라고 합니다.

 

라합은 참으로 지혜가 있는 여인입니다.

이미 군사들이 그 사람들이 라합의 집에 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왔기에 라합은 바로 동의합니자.

맞습니다. 참으로 그들이 여기 왔습니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저는 몰랐습니다.

그 사람들이 성문을 닫을 때쯤 되어 나갔으니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지 못하나 급히 따라가면 잡을 수 있을것이라고 합니다.

 

군사들이 요단 나루터까지 쫓아나가고 그들이 나가자 곧 여리고 성 성문이 닫침니다.

 

라합이 숨겨놓은 두 사람에게 가서 여차 여차 말하고 내가 너희를 선대 하였으니, 너희도 이 땅이 여호와가 너희에게 줄 때 나와 나의 부모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져 달라고 요청합니다.

라합은 약속을 해달라 하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고 증표를 달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보낸 정탐꾼 두 사람은 약속합니다.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지 아니하면 우리의 목숨으로 너희를 대신 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우리를 달아 내리는 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우리가 들어 올 때 네 모든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아라 누구든지 네 집에서 나가면 화가 미칠것이나 네 집에 모인 사람은 다 지켜줄 것을 약속합니다.

 

라합이 내가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너희는 산으로 가서 사흘을 숨어 있다가 뒤쫓는 군사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가라하고, 창문에 줄을 내리고 두 사람을 달아 내리고 붉은 줄을 창가에 매어 둡니다.

실로 라합은 여호와를 소문으로 들었지만, 그 소문을 믿었고 기회가 왔을 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지혜있게 행함으로 자신과 그의 부모와 형제와 함께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합니다.

어떻게 이 여인이 여호와는 상천 하지의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하였을까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믿음을 가진 이 여인을 구원하려고 여호수아로 하여금 정탐꾼을 여리고성으로 먼저 보낸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방여인이요 오늘날로 치면 여관을 하면서 음식을 팔고 사람들로부터 창녀라 불렸던 그 여인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음으로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깨닫고 그 믿음을 행함으로 온 가족을 죽음에서 구원하였습니다.

 

라합은 남자를 보는 눈이 있었습니다.

정탐꾼 중에 한 사람 살몬을 사랑하여 남편으로 맞이하였고 그는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보아스는 나오미를 따라온 이방여인 룻을 만나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습니다.

 

믿음의 열매는 행함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행함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행함이 믿음과 함께 가고 믿음이 행함과 함께 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살아가는 인생길에서 때를 아는 지혜는 성경으로부터 옵니다.

성경은 성령 하나님의 계시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합니다.

라합과 같이 때가 왔을 때 그 기회를 놓치지 않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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